익명의 계절들 — 제2화 · 없는 것을 세는 일

익명의 계절들 · 겨울
제2화 · 없는 것을 세는 일 · 전 11회 중 2회

서류 정리는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일이었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일. 칸이 있고, 그 칸에 들어갈 것이 있고, 그것을 옮겨 적으면 끝나는 일. 나는 그 정직함이 좋았다. 사람은 거짓말을 해도 날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이름은 이따금 틀리게 적혔지만, 틀린 것도 하나의 기록이었다. 오전 내내 남의 삶을 알파벳순으로, 날짜순으로, 병동순으로 다시 늘어놓았다. 김씨 다음에 또 김씨, 그다음에 다시 김씨. 한 사람이 병원에 들어왔다 나가기까지 남기는 종이의 양은 생각보다 많았는데, 그 대부분은 그 사람보다 병원 쪽에 필요한 종이였다.

일을 시작한 지 열흘쯤 됐을 때,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빈칸이었다.

정확히는, 빈칸이 있어야 할 곳에 그 빈칸조차 없었다. 서류에는 흐름이 있다. 입원이 있으면 퇴원이 있고, 전실이 있으면 그를 받아준 병동이 있다. 그런데 어떤 흐름은 중간에서 뚝 끊겨 있었다. 입원은 있는데 퇴원이 없었다. 3층 서쪽으로 옮겨진 기록은 있는데 그다음이 없었다. 처음부터 비어 있던 곳과는 결이 달랐다. 누군가 거기 있던 것을 지우고, 지웠다는 사실까지 지운 흔적이었다. 지나치게 말끔한 그 뒷정리가 오히려 손길을 드러냈다. 완벽하게 지운 곳은, 애초에 아무것도 없던 곳보다 더 크게 소리쳤다. 여기 무엇인가 있었다고.

그런 곳을 여섯 개 찾았다. 여섯 사람. 모두 5년 전 겨울, 모두 3층 서쪽. 그리고 모두, 그다음이 없었다.

처음엔 우연이라 여겼다. 두 번째까지도. 세 번째, 네 번째가 나오자 우연이라는 말이 목에 걸렸다. 퇴근 시간이 지나도 남아 서류를 뒤졌다. 밤이 되면 도시가 조용해졌고, 조용한 병원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는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 소리가 누구 귀에 닿을까 봐 자꾸 손을 멈췄다. 도둑질을 하는 것도 아닌데, 지워진 것을 찾는 일이 어째서 이토록 죄를 짓는 기분인지 알 수 없었다.

빈칸을 찾는 데에는 요령이 있었다. 있는 것을 보아서는 안 됐다. 없는 것을 보아야 했다. 입원이 있으면 퇴원이 있어야 하고, 처방이 있으면 투약이 있어야 하고, 검사가 있으면 결과가 있어야 한다. 그 짝이 맞지 않는 대목. 한쪽만 있고 다른 쪽이 비어 있는 대목. 그런 것들이 하필 5년 전 겨울, 3층 서쪽에 몰려 있었다. 그 겨울, 그 병동에서만 시간이 한 번 접혔다 펴진 것처럼. 접혔던 종이에는 늘 주름이 남았다. 아무리 펴도 지워지지 않는 주름이.

밤마다 그 여섯 개의 빈칸을 들여다봤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그 사람들을 몰랐다. 그런데도 그 빈칸들이 오래전부터 나를 기다려온 것 같았다. 하필 서류를 다루는 사람으로 이 병원에 흘러든 것이, 우연으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 이 빈칸을 들여다볼 사람 하나가 필요했고, 그 하나로 내가 왔다. 그런 생각이 드는 게 무서워, 그 무서움을 애써 밀어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내가 그 빈칸의 일부라는 것을 몰랐다.

밤에 혼자 남아 서류를 보던 어느 날이었다.

지하 문서고의 형광등은 다섯 개 가운데 둘이 나가 있었고, 나머지도 언제 나갈지 모르게 껌뻑였다. 그 껌뻑임 사이로 서가의 그림자가 자랐다 줄었다 했다. 캐비닛을 여닫는 소리가 벽에 부딪혀 되돌아왔다. 되돌아오는 소리는 늘 처음 낸 소리보다 조금 늦었고, 조금 낮았다. 그래서 이따금, 캐비닛을 닫지도 않았는데 어디선가 캐비닛 닫히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5년 전 3층 서쪽의 재원 기록을 넘기다, 종이 한 장에서 손이 멎었다.

간호 기록지 뒷면이었다. 앞면에는 멀쩡한 기록이 있었는데, 뒷면에 연필로 쓴 글씨가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지우개로 지운 뒤였다. 그런데 연필은 종이에 자국을 남긴다. 지워도 눌린 자국은 남는다. 불빛에 종이를 비스듬히 기울이자, 지워진 글씨가 그림자로 떠올랐다.

새벽 3시 20분, 3층 서쪽 복도 순회. 이상 없음. 그 아래, 다른 필체로 덧쓴 한 줄. 있었음.

두 글씨는 힘이 달랐다. 앞의 것은 습관처럼 눌러쓴 글씨였고, 뒤의 것은 손이 떨리는 사람이 급하게 눌러쓴 글씨였다. 이상 없음, 이라 적힌 뒤에 누군가 그것을 읽고, 아니라고, 있었다고, 반박하듯 덧쓴 것이다. 그러고는 둘 다 지웠다. 지웠어도 종이는 그 다툼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참을 그 종이 앞에 앉아 있었다. 형광등이 한 번 완전히 꺼졌다가 다시 들어왔다. 그 짧은 어둠 동안, 문서고 저편에서 종이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분명히 났다. 넘길 사람이 없는데. 어둠이 걷히고 불이 들어오자 소리도 그쳤다. 캐비닛 하나가 반쯤 열려 있었다. 방금 닫아둔 것 같은 캐비닛이. 다가가 안을 살폈지만, 오래된 서류철만 가지런했다. 손을 대자 손끝에 먼지 대신 물기가 묻었다. 지하인데도 그 캐비닛 안쪽만 축축했다. 탄 냄새와 물 냄새가 함께 났다. 불이 난 곳에는 늘 물을 뿌린다는 것을, 그제야 떠올렸다.

그날 밤, 그 종이를 복사해 주머니에 넣고 문서고를 나왔다. 계단을 오르는 내내 등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데 시선이 느껴지는 까닭은, 그날 밤 거기 있던 사람이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렸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이름을 잃은 사람은 죽어서도 명단에 오르지 못했고, 명단에 오르지 못한 시선은 갈 곳이 없어 산 사람의 등에 얹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뭘 그렇게 봐요.”

정은이었다. 어느새 뒤에 와 있었다. 반사적으로 서류를 덮었다가, 덮은 스스로가 우스워 도로 폈다. 숨길 까닭이 없었다. 숨길 까닭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아직 몰랐지만.

“흐름이 끊긴 게 있어서요.” 여섯 명. 5년 전 3층 서쪽. 입원까지는 있는데 그다음이 없다고. 지워진 순회 기록 이야기도 했다. 이상 없음, 그 위에 덧쓴 있었음, 이야기도.

정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걷혔다. 잠깐 복도 양쪽을 살폈다. 병원에서 오래 일한 사람 특유의,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주변을 확인하는 버릇.

“그 얘기는,” 낮게 말했다. “여기선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왜요.”

“…퇴근하고요.”

병원 뒤편 정류장 옆 포장마차에서 만났다.

어묵 국물에서 김이 올라왔다. 정은은 목도리를 턱까지 끌어올린 채 한참 말이 없었다. 나는 재촉하지 않았다. 재촉하지 않는 일이라면, 내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잘하는 것이었다. 무엇을 기다리는지도 모른 채 5년을 기다려온 사람에게, 침묵을 견디는 일쯤은 어렵지 않았다.

“5년 전에 불이 났었어요.” 마침내 입을 열었다. “3층 서쪽. 새벽이었고, 스프링클러가 터지지 않았어요. 나중에 밝혀지기로는, 점검 기록은 있는데 실제 점검은 하지 않았더래요. 종이로만 점검한 거죠. 그날 밤 당직은 둘이었어요. 병동 하나에 간호사 둘. 원래는 더 있어야 하는데, 인건비 아낀다고 계속 줄였거든요.”

“사망자는요.”

“공식적으로는 세 명.” 국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그날 그 병동에 있던 사람은 그보다 많았어요. 저는 그때 실습 나온 학생이었어요. 스물둘. 아무것도 몰랐고, 아무것도 못 했어요.”

목소리가 거기서 끊겼다. 나는 그 끊긴 데를 알았다. 내 몸속에도 그런 데가 여럿 있었으니까. 말하려 들면 목이 먼저 조여오는 곳들.

“복도 끝에서 한 아이가 저를 불렀어요.” 다시 말했다. 국물만 들여다보면서. “이름을 불렀는지, 그냥 사람 있냐고 소리친 건지는 모르겠어요. 연기가 너무 많아서 얼굴도 보이지 않았고. 저는… 못 갔어요. 발이 움직이지 않았어요. 계단 쪽에서 누가 제 팔을 잡아끌었고, 정신 차려보니 밖이었어요. 그 뒤로 저는 그 목소리를 매일 밤 들어요. 잘 때마다. 처음엔 꿈에서만 들렸는데, 요즘은… 깨어 있을 때도 들려요. 병원 복도에서. 특히 3층 근처를 지날 때.”

컵을 감싼 손이 하얬다.

“선생님은 믿지 않으시겠지만.” 정은이 처음으로 나를 똑바로 봤다. “그 병동, 아직 누가 있어요. 밤에요. 순회를 돌면 3층 계단 쪽에서 발소리가 나요. 분명히 나는데, 돌아보면 없어요. 한번은 CCTV를 돌려봤어요. 발소리 난 시각을. 화면엔 아무도 없는데… 복도 끝 벽에 글씨가 있었어요. 낮엔 없던 글씨가. 다음 날 가보면 또 없고요. 다들 제가 예민하다고 해요. 근데 예민한 사람 눈에만 보이는 것도, 있는 거잖아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았다. 바닷가에서 회색 코트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던 그 저녁, 내 발도 그랬으니까. 우리는 같은 병을 앓는 사람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몸이 마음을 배신하는 병. 그리고 그 병을 앓는 사람에게만 죽은 이들이 말을 거는 것인지도 몰랐다. 구하지 못한 사람을 알아보고, 구하지 못한 사람을 기어이 찾아오는 것인지도.

“그 아이는요.” 겨우 물었다. “구조됐어요?”

정은이 고개를 저었다. 아주 천천히.

“그 아이 이름이 어디에도 없어요.” 말했다. “명단에도, 기사에도, 위령비에도. 사망자 세 명 중에 그 아이가 있는지조차 몰라요. 무연고 한 명은 이름이 나오지 않았거든요. 그냥 무연고 사망자 한 명, 이라고만.”

무연고. 그 단어를 입안에서 굴려봤다. 이을 연이 없는 사람. 세상과 이어진 끈이 하나도 없다고 국가가 판단한 사람. 그런 사람은 법에 따라 지방자치단체가 처리한다. 일정 기간 공고를 내고, 나타나는 이가 없으면 화장해 봉안한다. 잘못된 절차는 아니었다. 잘못된 것은, 나타날 사람이 분명 있었는데도 끝내 찾지 않은 일이었다. 끈이 있었는데도 없다고 적어버린 일. 없다고 적혔을 뿐, 그 끈은 어딘가에서 여전히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그날 밤, 오래 꿈을 꿨다.

물이었는지 불이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둘 다였던 것 같다. 발밑에서 무엇인가 뜨겁게 타올랐는데, 그것을 밟고 선 몸은 허리까지 물에 잠겨 있었다. 누가 발목을 붙들고 아래로 끌어당겼다. 위에서는 누가 이름을 불렀다. 준호야. 준호야. 그게 내 이름이라는 걸 꿈속에서는 알았다. 대답하려는데 입에 물이 찼다. 대답 대신 물을 삼켰고, 삼킨 물에서 탄 냄새가 났다.

깨어보니 이불이 땀에 젖어 있었다. 창밖 외벽의 지워진 글자가 새벽빛에 반쯤 드러나 있었는데, 그 순간 아주 잠깐, 그것이 사람 이름처럼 보였다. 눈을 비비자 다시 아무 뜻 없는 얼룩으로 돌아갔다.

탁자 위의 종이를 다시 펼쳤다. 박준호. 꿈에서 누가 부르던 그 이름. 그 세 글자를 처음으로 소리 내어 불러봤다. 준호야. 방 안 공기가 미세하게 달라졌다.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대답을 기다리는 침묵의 결이 조금 바뀌었다. 오래 부르지 않은 이름을 부르면, 이름이 먼저 놀란다. 그리고 놀란 이름은, 그 이름을 오래 기다려온 누군가를 불러낸다.

간주 · 창가 쪽 침대 — 은희가 쓴 것들

(김은희의 유품 상자에서 나온 종이 몇 장. 부치지 못한 편지들. 뒷날 조부가 이미애에게 건넸고, 이미애가 그 방 벽에 붙였다.)

할아버지.

오늘은 간호사 언니가 침대를 창가 쪽으로 옮겨줬어. 규칙 위반이래. 걸리면 혼난대. 그래도 옮겨줬어. 밤에 오는 아저씨가 부탁했대. 그 아저씨는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아. 물어보면 그냥 웃어. 아저씨도 잠을 잘 못 자나 봐. 밤마다 복도에 있거든. 나처럼.

창가에서는 바다가 보여. 낮에는 보이지 않는데 밤에는 보여. 이상하지. 밤바다는 까만데, 그 까만 데서 자꾸 반짝이는 게 있어. 아저씨가 그러는데 그건 배래. 밤에도 나가는 배가 있대. 다들 자는 동안에도 누군가는 바다에 나가 있대. 그 말이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어. 내가 자는 동안에도 누가 나 대신 깨어 있다는 게.

할아버지, 나 나으면 진짜 바다 갈 거야. 발 담글 거야. 차가워도 참을 거야.

할아버지.

오늘은 몸이 좋지 않았어. 그런데 아프지 않다고 했어. 아프다고 하면 검사를 더 하니까. 검사는 무서워. 검사보다 더 무서운 건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밤이야. 그런 밤엔 시계 소리가 너무 커.

아저씨한테 그 얘길 했더니, 순회 돌 때 내 병실 앞에서 한 번 더 멈춰준댔어. 그러면 시계 소리 대신 아저씨 발소리를 세면 된대. 그래서 요즘은 발소리를 세. 하나, 둘, 셋. 아저씨가 오면 열까지 세기도 전에 잠들어.

할아버지도 밤에 잠이 오지 않으면 뭐라도 세어 봐. 세는 건 기도랑 비슷한 것 같아. 하나, 둘, 셋. 그러다 보면 아침이 와.

(이 편지 뒤로는 아무것도 없다. 은희는 그 겨울을 넘기지 못했다. 마지막 장은 쓰다 만 것이었다. 첫 줄만 남아 있었다.)

할아버지, 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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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수 — Editlab 대표 · 작가
장편소설 『선택』 『물먹은 벽지』 『달의 수로를 걷는 밤』. 프로필·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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