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진은 사진첩을 카운터 위에 펼쳤다.
낡은 코팅지 안에서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바닷가에서 어깨동무를 한 두 아이. 운동장에서 트레이닝복을 입고 땀에 젖은 청년. 창가에서 김 서린 유리에 손가락으로 뭔가 쓰다가 장난스레 지우는 표정. 그 얼굴들을 하나씩 봤다. 낯설었다. 솔직히 말해, 완전히 낯설었다. 내 얼굴이 저기 있다는 확신이 조금도 서지 않았다.
“이게 저라는 거예요?”
“오빠예요.” 미진이 청년의 얼굴을 가리켰다. “고등학교 때. 이건 스물셋. 이건… 마지막으로 같이 찍은 거예요. 오빠가 병원에서 일할 때. 5년 전 가을.”
그 사진을 물끄러미 봤다. 청년은 웃고 있었고, 왼손으로 담배를 든 채 오른손으로 카메라를 향해 뭐라 하는 중이었다. 담배. 왼손. 나도 모르게 제 왼손을 봤다. 바닷가에서 필터를 물던 손. 바람을 등지려 반쯤 돌아서던 어깨.
“오빠는 담배 피울 때 꼭 왼손으로 바람을 막았어요.” 미진이 내 시선을 따라오며 말했다. “오른손잡이인데도요.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왜 그러냐고 물으면, 불이 꺼지는 게 싫다고. …방금도 그러셨어요. 아까 문 열고 들어올 때 창밖에서 담배 피우고 계셨죠. 왼손으로 바람 막고.”
대답하지 못했다. 창밖에서 담배를 피운 기억은 있었다. 왼손이었는지는 몰랐다. 몸은 알고 머리는 모르는 일. 또 그거였다.
“믿기 어려우시겠죠.” 미진이 사진첩을 쓸며 말했다. “저도 처음엔 믿지 않았어요. 정은 언니가 연락 왔을 때. 병원에 새로 온 서류 직원이 오빠 같다고. 5년 전 제가 병원 게시판에 붙여둔 실종 전단이랑 얼굴이 닮았다고요. 저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닮은 사람’을 봤는지 몰라요. 다 아니었어요. 그래서 이번에도 믿지 않으려고 했는데…”
말을 멈췄다.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그 사람이 면접에서 ‘기록이 필요하다’고 했다고. 자기가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아서 병원에 왔다고요. 그 말 듣는 순간… 알았어요. 오빠가 맞다고. 오빠가 늘 그랬거든요. 기록되지 않으면 없는 거랑 같다고. 사진 찍지 않는 사람들 보면 답답해했어요. 이 순간이 없어지잖아, 하면서.”
기억하지 못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은 일과 같다. 부엌 탁자 위 그 메모. 손에 익은 그 글씨. 이제 어디서 왔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잊어버릴 걸 미리 안 사람이, 잊어버릴 자신에게 남긴 한 줄. 유서 같은 것.
“오빠는,” 미진이 이었다. “5년 전 그 화재 나던 밤, 병원에 있었어요. 야간 이송이랑 잡일 하는 일이었어요. 정직원도 아니고, 그냥 밤에 환자 옮기고 청소하고 그런 거요. 그날 밤 불이 났고… 그다음부터 오빠가 없어졌어요. 병원에서는 오빠가 그날 근무자 명단에 없다고 했어요. 비정규직이라 명단 관리가 엉망이었다고.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는데, 마지막 위치가 병원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어요. 5년이에요. 저는 5년 동안 오빠가 죽은 줄 알았다가, 살아 있는 줄 알았다가, 다시 죽은 줄 알았다가 했어요.”
일곱이에요. 미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산 채로 지워진 사람. 그날 밤 3층 서쪽에 분명히 있었는데, 어느 명단에도 없는 사람. 그게 누구인지, 이제 부정할 수 없었다. 다만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입 밖에 내면 그날 밤 무엇을 못 했는지도 함께 진짜가 될까 봐.
미진은 그 뒤로 자주 도서관에 왔다.
처음엔 멀찍이 앉아 나를 보기만 했다. 그러다 조금씩 다가왔다. 어느 밤엔 오빠가 좋아하던 거라며 호두과자를 사 왔고, 어느 밤엔 낡은 카세트테이프를 가져와 옛날 노래를 틀었다. 오빠가 이 노래 부르며 설거지했다고. 그 노래를 몰랐다. 그런데 후렴에 이르자, 입이 저절로 따라 흥얼거렸다. 미진이 그걸 보고 울다가 웃었다.
“오빠는 음치였어요.”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지금도 음치네.”
그 노래가, 문 하나를 열었다.
이번엔 병원 냄새가 여는 문이 아니었다. 부엌이었다. 좁은 부엌. 어머니가 싱크대 앞에서 그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이 노래였다. 미진이 튼 바로 그 노래. 어머니는 노래를 부르며 파를 썰었고, 도마 소리가 노래의 박자를 맞췄다. 김 서린 창문에, 어린 손 하나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다 지우고, 또 그리고. 그 손이 내 손이었다. 그 옆에 더 작은 손 하나가 똑같이 유리에 그림을 그리려고 폴짝거렸다. 미진이었다. 대여섯 살쯤의 미진.
기억이 아니라, 그 부엌 안에 실제로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등, 노랫소리, 파 냄새, 유리에 서린 김의 축축함, 발밑 장판의 차가움까지. 지어낸 장면이 아니었다. 누가 건네준 사진도 아니었다. 처음으로, 온전히 내 것인 기억이었다. 5년 동안, 아니 그보다 오래 잃어버렸던 첫 번째 진짜 기억.
“미진아.” 나도 모르게 불렀다. 이번엔 종이에서 배운 이름이 아니라, 그 부엌에서 데려온 이름으로. “너, 어릴 때 유리에 그림 그리다가 나 따라 한다고… 발뒤꿈치 들고.”
미진이 얼어붙었다. 카세트가 다음 곡으로 넘어가는 소리만 방을 채웠다.
“…기억나요?” 미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기억났다. 그 순간만은, 분명히. 온전히. 그 부엌에서 어머니가 살아 파를 썰던 어느 저녁이, 5년의 안개를 뚫고 돌아와 있었다. 그런데 그 기억이 돌아온 곳에, 곧바로 다른 것이 따라 들어왔다. 그 부엌의 어머니는 이제 없다는 것. 그 노래를 부르던 등은 흙 아래 있다는 것. 기억은 늘 그랬다. 따뜻한 것을 돌려주면서, 그것을 이제 잃었다는 사실도 함께 돌려줬다. 되찾는 일과 다시 잃는 일이, 같은 문으로 한꺼번에 들어왔다.
미진이 나를 끌어안았다. 처음으로. 5년 만에 오빠를 되찾은 동생이 아니라, 방금 함께 어머니를 다시 잃은 동생으로. 우리는 카세트 노래가 다 끝날 때까지 그러고 있었다. 음치인 오빠와, 그 오빠를 따라 발뒤꿈치를 들던 동생. 그 두 아이가, 어른이 되어 도서관 뒷방에서 서로를 안고 있었다. 어머니의 노래를 사이에 둔 채.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됐다.
미진은 과거를 강요하지 않았다. 기억나느냐고 자꾸 묻지도 않았다. 말없이 옆에 앉아 있었다. 남매란 본디 그런 것인지도 몰랐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 오래 침묵해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 그 편안함이, 기억보다 더 확실한 증거처럼 느껴졌다. 머리는 그녀를 몰라도, 몸은 그녀 옆에서 긴장을 풀었다.
“오빠가 없어지고,” 어느 밤 미진이 조용히 말했다. “저는 오빠를 원망도 많이 했어요. 엄마 돌아가시고 나 혼자 남겨두고, 이제 오빠까지 없어졌으니까. 근데 시간이 지나니까 원망도 못 하겠더라고요. 원망하려면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오빠는 없었으니까. 원망할 사람이 없는 건, 미워할 사람이 없는 것보다 더 외로워요.”
그 말에 대답하지 못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너무 가벼웠고, 다른 말도 없었다. 대신 그녀가 가져온 호두과자를 하나 집어 먹었다. 그게 할 수 있는 대답이었다. 네가 사 온 걸 내가 먹는다. 우리는 이제 같이 무엇인가를 먹는 사이다. 오늘은, 그거면 충분했다.
전화가 온 것은 어느 새벽 세 시였다.
정은이었다. 목소리가 반쯤 잠겨 있었다. 병원 야간 근무 중이라고. 지금 좀 와줄 수 있냐고. 무슨 일이냐고 묻자, 한참 말이 없다가 겨우 한마디 했다. 오늘은 달라요. 오늘은 소리가 멈추지 않아요.
택시를 잡아탔다. 새벽 병원은 낮보다 컸다. 정은이 응급실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이 종잇장 같았다. 손이 떨려 커피 자판기 컵을 두 번 떨어뜨렸다.
“저 혼자 못 있겠어요.” 정은이 말했다. “3층 순회를 도는데… 소리가 계단까지 따라 내려와요. 5년 동안 이런 적 없었어요.”
같이 올라가자고 했다. 정은이 나를 봤다. 미친 소리라 할 줄 알았다는 얼굴로. 그런데 나도 알아야 했다. 그 소리가 무엇인지. 5년 전 그 밤부터 나를 부르던 것이 무엇인지.
계단을 오를수록 공기가 무거워졌다. 3층 복도에 들어서자, 온도가 한 번에 떨어졌다. 입김이 났다. 병원 안인데. 그리고 소리가 있었다. 낮게, 여럿이, 무엇인가를 번갈아 외는 소리. 이름과 날짜. 이름과 날짜. 하나가 외면 다른 하나가 받았다. 복도 끝, 불 꺼진 그 병실 쪽에서였다.
“들려요?” 정은이 속삭였다. 이가 부딪는 소리가 섞였다.
들렸다. 처음엔 뜻 없는 웅얼거림 같더니, 귀가 익자 단어가 잡혔다. 그건 이름이었다. 여섯 개의. 손칠복. 이수진. 응웬반토안. 김말순. 박동수. 그리고 김은희. 미애의 방 벽에 붙어 있던 그 여섯이, 복도의 어둠 속에서 저희 이름을 서로 부르고 있었다. 세상이 지운 이름을, 저희끼리 잊지 않으려고, 5년째 돌아가며 외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으니까, 서로를 불렀던 것이다.
손전등을 복도 끝 벽으로 비췄다. 젖은 얼룩 같은 게 있었다. 그런데 그 얼룩이, 보는 앞에서 번져 글자가 되어 갔다. 낮엔 없던 글자. CCTV에만 잡히던 그 글자. 있었음. 그리고 그 아래로, 여섯 개의 이름이 물기처럼 배어 나왔다. 벽이 울고 있는 것 같았다. 5년 동안 삼킨 이름들을, 벽이 땀처럼 밀어내고 있었다.
정은이 내 팔을 잡았다. 도망치자는 손이었다. 그런데 발이, 이번엔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라 앞으로 갔다. 5년 전 그 밤에도, 바닷가 그 저녁에도 움직이지 않던 발이, 처음으로 무서운 것을 향해 걸음을 뗐다.
복도 끝, 그 병실 문 앞에 섰다. 손끝이 5년 전처럼 뜨거울까 봐, 문에 손을 대기가 무서웠다. 그러나 이번엔 문을 여는 대신, 이름을 불렀다. 소리 내어. 하나씩. 손칠복 님. 이수진 님. 응웬반토안 님. 김말순 님. 박동수 님. 그리고, 은희야.
이름을 다 부르자, 소리가 멎었다.
복도가 조용해졌다. 온도가 천천히 본래대로 돌아왔다. 벽의 글자가 다시 얼룩으로 흐려졌다.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 울던 아이가 겨우 잠든 방의 고요 같았다. 그 침묵 속에서 알았다. 저들은 우리를 해치려던 게 아니었다. 이름을 돌려달라고, 5년째 문 앞에 와 서 있었던 것이다. 산 사람이 불러주지 않으니, 죽은 사람끼리라도 부르면서. 무서운 건 유령이 아니었다. 5년 동안 아무도 그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무서운 거였다.
정은이 벽에 등을 기대고 주저앉아 울었다. 나는 그 옆에 앉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이제 알겠어요.” 정은이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소리를 멈추는 방법. 도망치는 게 아니었어요. 부르는 거였어요.”
그날 새벽, 우리는 결심했다. 이 이름들을 세상에 내놓기로. 무서워서가 아니라, 이제 무엇이 무서운 일인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이름을 부르는 건 무섭지 않았다. 부르지 않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일이었다.
봄이 오는 동안, 기사를 준비했다.
미애가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지역 신문 기자가 있었다. 윤성재. 사회부에 오래 있다가 지금은 편집국에서 데스크를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미애의 자료를 몇 시간이나 들여다보더니, 안경을 벗고 눈을 눌렀다.
“자료는 충분해요.” 말했다. “충분한데, 자료가 충분한 거랑 기사가 나가는 건 다른 문제예요.”
그가 설명한 것들은 냉정했지만 정확했다.
“이걸 쓰면 병원이 가만있지 않아요. 제일 먼저 정정보도청구가 들어와요. 언론중재위원회에요. 우리가 쓴 사실이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정정보도랑 반론보도를 요구할 거예요. 그건 절차니까 각오해야 하고. 그다음이 진짜 문제인데.” 잠깐 뜸을 들였다. “명예훼손이에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는데, 우리나라는 사실을 써도 명예훼손이 돼요. 형법 307조 1항. 진실한 사실을 적시해도, 그게 누군가의 사회적 평가를 떨어뜨리면 처벌 대상이에요.”
“사실인데도요?” 미애가 물었다.
“사실인데도요. 대신.” 손가락을 하나 들었다. “310조라는 게 있어요. 그 사실이 진실이고,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거면, 위법성이 없어져요. 처벌받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길 방법은 딱 하나예요. 첫째, 쓴 게 다 진실이어야 하고. 둘째, 이게 누구 하나 망신 주려는 게 아니라 공익을 위한 거라는 게 분명해야 해요. 사감이 섞이면 안 돼요, 미애 씨.”
미애가 고개를 들었다.
“저 사감 있어요.” 말했다. “5년을 이것만 봤는데 어떻게 사감이 없어요.”
“알아요.” 윤성재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니까 기사는 미애 씨가 쓰는 게 아니라 제가 써요. 미애 씨는 자료를 주고, 저는 그 자료에서 사감을 걷어내고 사실만 남겨요. 그게 이 사람들 이름을 지키는 방법이에요. 분노로 쓴 기사는 하루 만에 잊혀요. 사실로 쓴 기사는… 오래 가요.”
그날 밤부터, 자료를 사실과 추정으로 나눴다. 윤성재는 냉정했다. 심증은 확실해도 물증이 약한 것들을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아홉 개가 진실이어도 하나가 틀리면 사람들은 그 하나만 기억한다고. 증언도 정식으로 받아야 한다고 했다. 은희 조부. 그날 밤 연락을 못 받았다는 것을 본인 입으로, 실명을 밝혀도 좋다는 동의서까지. 그리고 하나 더. 병원이 5년 전 저지른 일, 유족 확인을 하지 않고 기록을 정리한 것. 그건 허위공문서작성일 수 있는데, 그 죄의 공소시효가 7년이라 아직 남아 있다고. 다행이지만, 시간이 없다고.
수첩에 적었다. 자료를 사실과 추정으로 나누는 일은, 도서관에서 책을 제 곳에 꽂는 일과 닮아 있었다. 아무 데나 꽂으면 영영 못 찾는다. 정확한 곳에 꽂아야, 필요할 때 꺼낼 수 있다. 진실도 그랬다. 정확한 곳에 놓아야, 필요할 때 사람을 지킬 수 있었다.
(작은 수첩 한 권. 화요일마다 병원 주변을 돌며 적은 것들. 문장은 대개 짧고, 마침표 대신 쉼표로 맺는다.)
3월 4일. 새벽 세 시. 응급실 앞. 오늘도 아무 일 없었음, 아무 일 없다는 게 제일 무서운 일이라는 걸 이제 안다,
3월 11일. 비. 3층 서쪽 창에 불빛, 잠깐. 눈을 의심했지만 분명 있었음, 없는 병동에 켜지는 불은 누가 켜는 걸까,
3월 25일. 국밥집 주인이 손칠복 노인을 기억한다고 함. 백 원 이야기. 이런 조각 하나에 며칠을 산다, 죽은 사람의 백 원이 산 사람을 살린다,
4월 2일. 은희 조부에게 편지 받음. 손이 떨려 다 못 읽고 덮었다가 다시 폄. 아이가 밤에 오는 아저씨 이야기를 자주 썼다고, 그 아저씨가 누군지 나도 알고 싶다,
4월 19일. 잠을 잤다. 오랜만에. 새로 온 서류 직원 이야기를 들었다. 여섯 개를 찾았다고. 5년 만에 혼자가 아닌 것 같다, 혼자가 아니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일인 줄 몰랐다, 이제 그만둘 수가 없어졌으니까,
5월 6일. 그 사람 얼굴을 오래 봤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나지 않는 게 아니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 같다, 어떤 얼굴은 알아보는 순간 너무 많은 게 무너지니까,
(마지막 장. 날짜 없음.)
이름을 다 찾으면 나는 무엇을 하지. 5년 동안 이걸 붙잡고 살았는데, 이걸 놓으면 나는 무엇으로 살지.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이걸 하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기대는 일도, 기억의 한 방식이니까,
나는 스물둘에 사람이 죽는 걸 봤다. 정확히는, 사람이 죽는 걸 못 본 척하는 나를 봤다.
실습 나온 첫 겨울이었다. 아직 주사도 제대로 못 놓던 때. 그날 새벽에 불이 났고, 나는 3층 서쪽에 있었다. 왜 거기 있었는지는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심부름이었던 것 같다. 연기가 복도를 채우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세상이 그토록 빨리 검어질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복도 끝에서 목소리가 났다. 여자애 목소리. 언니, 여기요, 였는지, 그냥 사람 있어요, 였는지. 연기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목소리만 있었다. 목소리는 손보다 멀리 간다. 그 애의 손은 보이지 않았는데, 목소리는 내 발밑까지 왔다.
나는 못 갔다.
다리에 힘이 없었던 게 아니다. 다리가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머리는 가라고 했는데, 다리는 가지 않았다. 그 몇 초 사이에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버렸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는 나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남의 목소리보다 내 목숨이 무거운 사람. 그때 누가 뒤에서 내 팔을 잡아끌었고, 정신 차려보니 밖이었다. 살았다. 그 애는 못 살았다. 그 애 목소리로 내가 살았다.
그 뒤로 5년을, 나는 그 목소리를 안고 잔다. 처음엔 꿈에서만 왔다. 언니, 여기요. 그러다 언젠가부터, 깨어 있을 때도 왔다. 병원 복도에서. 특히 3층 근처를 지날 때. 사람들은 내가 예민하다고 했다. 트라우마라고, 상담을 받아보라고. 나는 받지 않았다. 상담을 받으면 그 목소리가 사라질까 봐. 그 목소리가 사라지면, 그 애가 정말로 없어질 것 같아서. 무서운 건 목소리가 아니었다. 목소리가 멈추는 거였다.
새 직원이 왔을 때, 나는 그 사람 걸음을 먼저 봤다. 병원 복도를 걷는데, 어딘가 나 같았다. 발이 늘 반 박자 늦는 사람. 어디로도 급히 가지 않는 사람. 발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발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을 알아본다. 우리는 같은 병을 앓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면접에서 그랬다고 들었다. 기록이 필요하다고. 지워지고 싶지 않다고. 그 말을 전해 듣는데, 손이 떨렸다. 5년 전 게시판에 붙어 있던 실종 전단의 얼굴이 떠올랐다. 매일 출근길에 보던 그 얼굴. 그 애 언니가 붙여둔 전단. 오빠를 찾습니다. 나는 그 언니한테 전화를 걸었다. 아마 아닐 거예요, 하고 몇 번이나 덧붙이면서. 그런데 속으로는 알았다. 맞다는 걸.
내가 왜 그랬는지, 정확히는 모르겠다. 5년 전에 그 애를 못 구한 죄를, 이번엔 그 언니한테 오빠를 찾아줌으로써 갚으려 했는지도. 그렇다면 나는 이번에도 나를 위해 움직인 거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발이 움직이지 않던 다리로, 이번엔 전화기를 들었으니까. 그거면, 반 걸음은 간 거니까.
요즘은 그 목소리가 조금 조용해졌다. 이름들이 하나씩 제집을 찾을 때마다, 그 애도 조금씩 편해지는 것 같다. 언젠가 그 목소리가 완전히 멈추면, 나는 아마 울 것이다. 슬퍼서가 아니라, 그 애가 드디어 이름을 찾아 잠들었을 테니까. 그러면 나도, 스물둘의 그 겨울에서 처음으로 걸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반 걸음씩, 늦더라도.
장편소설 『선택』 『물먹은 벽지』 『달의 수로를 걷는 밤』. 프로필·작품 ›
